필리핀은 관광객에게 두 가지 패를 보여준다. 뼈대가 드러나는 낡은 회색 건물과 낮은 건물의 양철지붕, 상가마다 내려진 셔터 위에 그려진 울긋불긋한 낙서들, 도무지 양보해주지 않는 자동차와 그때마다 귀를 찢을듯 울리는 경적,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일 렬로 앉아 무엇인가를 먹고있는 사람들, 맨발차림의 아이들과 윗도리를 벗어젖힌 노무자들, 그들 사이로 질주하는 주술적인 느낌의 무늬를 새긴 지프니(지프개조 미니버스).이런 것들이 필리핀 도시의 부정적 이미지를 상징하는 패라면, 이와 짝을 이루는 긍정적인 다른 쪽 패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남 서쪽으로 430㎞ 떨어져 있는 팔라완섬의 끝자락 엘니도(El Nido)에 가면 모두 발견할 수 있다.
햇빛과 조류의 방향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바다빛깔, 바다위로 거대하게 솟아있는 석회암 절벽들, 울긋불긋한 산호초, 그 사이 를 헤엄치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 자연친화적으로 설계된 리조 트와 불붙는 노을을 배경으로 식탁에 앉은 연인들.
이런 휴양지의 가장 중심에 바로 엘니도가 있고, 다시 그 엘니도의 심장에는 바로 미니록과 라겐, 두 리조트가 자리잡고 있다.마닐라와 휴양지의 낭만적인 공간은 마닐라 시내 소리아노항공사의 경비행장에서 뜨는 19인승 쌍발 프로펠러 경비행기인 ‘도니 에 228'이 연결해준다.
마닐라 공항을 이륙한지 1시간 20분이면 비행기는 엘니도 공항에 닿는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석회암 절벽의 무인도사이를 30~40분 달려야 미니록이나 라겐리조트에 닿 는다.전경 사진 한 장만으로도 충분히 여행객의 마음을 빼앗는 미니록 리조트는 사진 속의 모습 그대로 거기에 있었다.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와 산호초 사이를 유유히 헤엄치는 갖가지 크기의 물고기떼. 무엇보다 얕은 바다위에 일렬로 지어진 코티지(독립객실)는 상상속에서 그리던 남국 휴양지의 모습이다. 무엇하나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다. 대나무로 벽채를 짓고, 짚으로 지붕을 올린 리조트는 다소 낡아 보이지만, 오히려 뒤편의 석회암절벽 및 흰 모래해변과는 마치 잘 맞는 조각퍼즐처럼 어울린다.
인근의 라겐리조트는 미니록과는 좀 다른 분위기다. 자연적인 입지는 비슷하지만 주로 자연소재들로만 코티지를 꾸민 미니록과는 달리 대리석 등 인공재료들이 많이 사용됐다. 객실도 훨씬 고급스럽고 편안하다.
미니록과 마찬가지로 객실에는 TV가 없지만, 라겐에는 CD플레이 어가 있다. 미니록에는 없는 수영장도 있다. 사람들이 인공적인 소재와 분위기에 더 편안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미니록과 라겐리조트는 세끼 식사는 물론 각종 해양스포츠 이용 료를 포함해 객실을 제공하고 있다. 식사는 모두 뷔페식으로 차 려지고, 스노클링과 카약, 윈드서핑, 호비캣(소형요트의 일종) 등은 물론이고 스쿠버다이빙도 1회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또 인근 섬을 도는 호핑투어(섬일주관광)나 동굴탐험, 바다낚시 등도 모두 무료로 즐길 수 있다.이중 가장 압권은 바로 리조트인근의 라군(산호초로 둘러싸인 호수형태의 바다)투어. 하늘을 찌를듯 서있는 석회암 절벽이 사방 을 막아선 라군의 바다빛깔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다.
작은 배가 겨우 드나들만한 석회암 구멍을 통해 라군으로 들어서면 바다는 푸른 잉크빛부터 진초록과 연녹색, 그리고 검은 빛깔 까지 다양한 색조의 팔레트를 펼쳐보인다. 그 색깔들은 ‘자연'이라기엔 너무 완벽해 차라리 ‘인공의 모습'처럼 다가온다. 이렇게 완벽한 조화와 배색을, 균형과 자유스러움을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니….취재에 동행했던 한 사진작가는 이런 라군의 풍경에 좀처럼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지 못했다. “이렇게 사람을 압도하는 풍경을 사진속의 2차원공간에는 도저히 담아낼 자신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엘니도는 낙원은 아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는 마닐라시내의 혼돈과 빈민굴의 살풍경도 있고, 가난에 찌든 아이들의 눈망울과 원주민들의 고단한 삶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들에게 그 곳은 ‘낙원에 가까운 곳'이다. 엘니도의 그림같은 작은 섬에 사는 원주민 어부가 도회지의 삶을 ‘낙원'으로 동경하듯이, 도회지의 혼돈 및 살풍경과 맞닿아있는 삶을 사는 우리들은 엘니도 를 ‘낙원'으로 동경한다. 희디 흰 모래사장과 야자수, 바다위 에 떠있는 코티지 뒤로 걸린 불붙는 낙조. 이런 자연 풍광이 마 치 한장의 사진과도 같이 우리의 삶과 극적으로 대비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