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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향한 필리핀의 혁명 역사 전격조명 -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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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코리아포스… 댓글 1건 조회 2,609회 작성일 11-03-2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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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향한 필리핀의 혁명 역사 전격조명 - 1편


▦ 필리핀 독립을 향한 선전운동(Propaganda Movement)과 카티푸난 혁명

16세기 말 스페인의 식민지로 전락해 3세기가 넘도록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오던 필리핀,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필리핀인들은 자신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과 민족주의에 점차 눈을 뜨게 되었고 식민통치 하에서의 개혁은동을 점차적으로 전개해 나간다.

1872년 2월 20일 필리핀 군인들의 카비테 스페인 군 무기고 습격 및 스페인 장교 몇명 살해사건으로 스페인당국이 필리핀 신부 3명(자신토 사모라, 호세 불고스, 마리아노 고메스)을 포함한 수많은 필리핀 애국지사 처형이후 스페인 정부의 탄압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도피한다.

▦선전운동(Propoganda Movement)

115051011714solidaridad.jpg1872년 호세 리잘 박사를 비롯한 20~30대 초반의 부유하고 훌륭한 가문의 지식인 층에서 시작되었던 평화롭게 전개된 개혁운동 Propaganda Movement는 책. 기사, 팜플렛, 대중연설등을 통해 스페인 정부에 압력을 가하지만 1892년 리잘박사가 다피탄으로 유배되자 막을 내리게 된다.
1889년 2월 15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창간된 “라 솔리다리다드(La Solidaridad)”는 스페인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1895년 11월 15일 자금부족으로 폐간되었다. 
호세 리잘 박사의 스페인 관료들과 신부들의 직권남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Noli Me Tangere와 El Filibusterismo'는 1896년 발생한 필리핀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카티푸난(KATIPUNAN) 무장혁명

115050998214Katipunan.jpg1892년 7월 7일 보니파쇼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마닐라 톤도에 위치한 데오다토 아렐라노의 집에서 카티푸난(스페인 지배에 대항하여 필리핀인들이 무장혁명을 통해 승리를 이끌어 낸다 Katipunan-Kataasa Kagalang na Katipunan ng mga Anak ng Bayan)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이 결성되어 필리핀의 독립을 위한 무장혁명이 시작된다.

회원등급을 카티폰(핵심인물로 조직), 까왈, 바야니(애국자)로 나누어 관리했으며 이 조직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가담했다.
1895년 4월 10일 보니파쇼와 참모들이 몬탈반의 동굴에서 혁명의지를 다짐하며 동굴벽에 “필리핀 독립만세”라는 구호와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넣은 ‘몬탈반의 함성'을 실시했다.

일본과 호세리잘에게 카티푸난의 혁명활동을 지원해 달라고 했던 요청을 거절당했고 재력있고 지식있는 계층으로부터도 외면당한 카티푸난은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사각의 빨간 바탕위에 ‘K.K.K'라고 쓰여진 카티푸난 혁명기를 만들고 농부들과 마닐라 지역의 노동자들도 대거 가담하게 된다.

1896년 8월 19일 테오도로 파티노의 밀고로 스페인당국으로 인해 카티푸난 소속인 수백명의 조직원들과 애국자들이 투옥당했다.  

1896년 8월 30일 보니파쇼와 800여명의 혁명군이 산후안 델몬테의 스페인 군 무기고를 습격하는 최초의 전투가 실시되었으나 열악한 무기와 전투경험의 부족으로 패하였지만 필리핀 군도 전역을 혁명의 열기로 들끓게 만들었다.

▦호세리잘의 처형

혁명이 전개됨에따라 스페인정부는 호세리잘 박사를 1896년 12월 30일 루네타 광장(현 리잘공원)에서 총살한다.

▦아귀날도의 등장과 보니파쇼의 처형

에밀리오 아귀날도가 이끈 1896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전개된 카비테 비나카얀 전투에서 스페인의 라몬 블랑코 총독부대를 대파하는 첫승을 거둔다.
아귀날도의 연승으로 인기몰이를 하자 대립을 시작한 보니파쇼는 1897년 5월 10일 분티스 산에서 총살된다.

▦비악-나-바토 공화국 수립

스페인군에 밀려 도망다니던 아귀날도와 그의 혁명정부는 불라칸의 비악-나-바토(Biak-na-Bato)에 숨어 1897년 11월 1일 새 헌법을 제정하고 비악-나-바토 공화국을 수립하며 아귀날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리베라 총독의 평화제의를 받아들인 아귀날도는 1897년 12월 14일과 15일 양일간 만나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합의사항에 따라 홍콩으로 망명하며 비악-나-바토 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스페인으로부터 전쟁피해 보상금인 170만페소 중 60만 페소만을 받았고 혁명전투 또한 계속되어 평화협정은 준수되지 않았다.

▦미국의 개입

필리핀은 스페인의 혁명성공을 위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해 혁명에 성공하고 스페인은 필리핀을 떠났다. 그러나 미국 또한 필리핀을 자국의 식민지로 삼으려 하여 미국과 필리핀 사이에 또다른 전투가 시작되었다.

▦마닐라 만 전투(1898년 5월 1일)

스페인과 미국간 전투가 발발하자 홍콩에 있던 듀이 해군 준장이 코레히도르 섬을 통해 마닐라만으로 들어와 스페인 해군을 대파했다.
듀이장군의 마닐라 만 전투 승리 후 아귀날도와 혁명지도자들이 1898년 5월 19일 카비테로 돌아와 함께 싸우기 시작한다.

▦필리핀 독립선언

115050996614independence.jpg1898년 6월 12일 아귀날도 독재정부는 수천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카비테의 카윗에서 필리핀 독립을 선언했다.

아귀날도 자택의 발코니에서 리안자레스 바우티스트가 자신이 직접 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으며 그날 아귀날도는 최초로 필리핀 국기를 선보였고 필리핀 국가 또한 최초로 연주되었다.

필리핀 국기는 필리핀 외교관 펠리페 아콘실로의 아내인 마르셀라 아콘실에 의해 홍콩에서 만들어 졌으며 필리핀 국가는 당시 카비테의 음악교사였던 훌리만 펠리페에 의해 작곡되었다.



댓글목록

산가마니님의 댓글

산가마니 작성일

백성들이 있어야 국가도 있는법인데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사리 사욕만 관심이 있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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