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SA I 시민혁명 18주년
현재 20대부터 그보다 어린 세대들 약 430만여명은 지난 1986년 2월 22일부터 25일까지 있었던 EDSAI 당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정한 EDSAI을 재조명 하고자 책들과 신문기록등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이 내용을 통해 18년전 세계를 놀라게한 평화시민혁명의 내용을 알아보자.
첫째날 : 1986년 2월 22일
자정 : 후안 폰세 엔릴 방위부장관과 실베스트레 아파블외 다른 3인의 주요 공직자들이 개혁군 을 중심으로 말라카냥을 급습하고 구데타 정부를 설립한 후 자신을 대표자로 나타내는 엔릴의 연설문을 최종점검했다.
당시 계획되었던 말라카냥 급습은 23일 새벽 2시였다.
새벽 2시 : 파비안 벌 군사령관은 에드갈도 도로말 대통령경호대장으로부터 정권붕괴계획을 이미 입수하고 대통령궁에 철통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도로말은 엔릴이 가장 신임하던 그래고리오 호나산이 선택한 사람으로 그를 대통령궁의 상황을 전달해 주는 스파이로 심어 놓았는데 그가 자신의 상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고 결국 도로말 대장은 모두 2중 스파이 노릇을 시작하게 되었다.
새벽 3시 : 마카티 다스마리냐스에 위치한 엔릴의 집에서는 거의 모든 쿠데타 계획이 완성단계를 맞고 있었으나 호나산은 해병대가 공격지점에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오전 9시 : 군사령관 파비안 벌의 지시에 따라 로날도 아바딜라는 호나산측과 대화를 시도했다.
오전 10시 : 호나산은 대통령궁 경호를 위해 더 많은 군사들이 파병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으며 엔릴의 경호원 19명이 모두 체포되었다.
정오 : 말라카냥에서 마르코스 대통령은 당시 사건해결을 위해 미 대사와 레이건 미 대통령의 문제 해결사인 필립 하빕과 함께 미팅을 가졌으며 미국 자문인들은 정치적 위기해결을 위해 벌의 파직을 권유했다. 호나산과 에두알도 까티푸난은 엔릴의 집에 도착해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으며 엔릴의 결정에 따라 모두 캠프 아귀날도로 모였다.
오후 2시 : 하빕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1986년 2월 7일 선거에 코리 아키노가 이겼다. 마르코스 시대는 끝났으니 미국으로 망명을 허가한다,고 말했다.
오후 6시 45분 : 라모스와 엔릴은 기자회견을 통해 마르코스 지지 중단과 함께 자신들의 군 통수권을 시민들이 선출한 진정한 대통령인 토리 아키노에게 준다고 발표했다.
오후 저녁 9시 : 신 추기경이 라디오를 통해 시민들에게 엔릴과 라모스 군인을 돕도록 호소했다.
저녁 10시 30분 : 마르코스 대통령이 국영방송을 통해 정부가 이 사건을 잘 해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켐프 크라메 맞은편 EDSA 마리아상앞에서는 수녀들이 인간바리케이트를 형성했다.
저녁 11시 : 엔릴은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라디오방송을 통해 “당신의 시간은 끝났다. 더이상 우리를 얕보지 말라.”고 퇴임을 축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