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섬의 남단에 위치한 발랑히가는 작은 항구도시로 미국 식민초기에 필리핀 게릴라와 시민들에게 가장 잔인한 캠페인이 감행되었던 장소이다.
1901년에서 1902년까지 실시될 이 캠페인은 미국 식민기간동안 발랑히가 학살로 알려진 사건때 미군이 대량으로 필리피노에 의해 살해된 이후 발생한 직접적 결과였다.
사마는 숲이 우거진 산악지대로 세기전환기에도 아직 인구 밀집도가 낮았다. 따라서 필리핀 게릴라들에게 이상적인 피난처가 되었던 것이다. 비센데 룩반을 지도자로 하는 사마 게릴라는 미군의 도래에 대비해 성내부에 강한 군사력을 쌓고 있었다.
대부분 배테랑으로 구성된 미군은 1901년 8월11일 사마에 도착하여 요새를 구축했다. 그들의 목적은 게릴라를 진압하고 전역을 미국의 통치하에 넣는것이었다.
군사령관 토마스 코넬은 필리핀 주민들이 게릴라들에게 음식과 정보를 준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바나나 나무들을 다 자르고 식품과 생필품을 압수하도록 명했다.
한편, 게릴라와 동조하고 있던 필리피노의 사마대표는 즉시 비밀회의를 열어 무장한 미군을 무찌를 전략을 세웠다. 주민과 게릴라는 ‘볼로스’와 대나무 창밖에 없었으므로 미군이 그들의 총을 부대에 두고 밥을 먹는 아침식사시간에 기습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계획대로 아침에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180명의 볼로와 창으로 무장한 필리피노들이 갑자기 미군을 습격했고, 그자리에서 많은 미군들이 숨졌다.
도망가던 병사들도 모조리 죽였다. 1시간 반 가량 후 타운 플라자는 피로 물들고 떨어져 나간 살점들이 널부러졌다.
74명의 미군중 36명만이 살아남았고, 그중 30명은 중상을 입었다. 8명은 후에 죽었다. 필리핀 게릴라들은 압수한 총과 병기를 들고 산으로 달아났다.
발랑히가 학살은 비록 무장이 완벽하지 않은 필리피노들이지만 그들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하는 애국심을 잘 보여준 예였다. 미국 지도자들은 이를 아직 인식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미 해군 사령관 브리게이디어 제니탈 아드나는 사마를 “진압”하도록 제이콥 스미쓰에게 명했다.
스미쓰는 미 해군은 이끌고 “더 많이 불태우고 죽일수록 더 나를 기쁘게 한다”고 관악한 통치를 펴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복종하지 않거나 10살짜리 소년이라도 총을 들수 있는 이는 누구든 쏴버리도록 명령했다.
스미쓰의 이런 피와 철의 정책은 “무시무시한 황무지”를 만들었다. 미군이 자유군을 쫓아내고 나면 주민의 집을 불태우고 식료품을 약탈했으며, 협조하지 않는 주민은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적지 않은 수의 주민이 죽었다.
미군의 견해로 보아 스미쓰의 잔인한 정책이 효과가 있어 보였다. 1902년 2월 27일 발랑히가 학살이후 5달도 채 못되 룩반이 잡히면서 사마의 저항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