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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이슬람교 관계역사

작성일 11-03-2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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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리아포스… 조회 2,43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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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이슬람교 관계역사

  

필리핀의 이슬람교도

 

필리핀을 식민지로 한 스페인인은 필리핀의 이슬람교도를 「모로」라고 부르며 차별했다. 「모로」란 8 세기에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한 북부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 무어인과 동일시해 부른 명칭이다. 그 후 필리핀의 이슬람교도는 「반사모로」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이슬람교의 전래
필리핀에 이슬람교가 전해졌던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10 세기무렵부터 아랍 상인이 내방하고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14 세기무렵부터 이슬람교가 침투해 갔다고 보여지는데 14 세기말무렵에 Sumatra로부터 라쟈·바긴다가 술르 제도로 와 원주민을 지배했다고 여겨져 15 세기 중순에 죠호르에서 하 심·아부바칼과 라쟈·바긴다의 딸이 결혼, 술탄(이슬람 군주)으로서 필리핀에서 최초의 이슬람 왕국인 술루 왕국을 졸로섬에 건국했다. 그 후 술루 왕국은 술루 제도를 중심으로 판도를 확대, 18 세기무렵에는 바실란섬, 타위타위섬, 잠보앙가 반도, 팔라완섬, 사바(현 말레이지아령)를 영유 하고 있었다.

한편, 16 세기 초에는 죠호르에서 온 샤리후·카분스원이 마긴다나오족을 정복, 술탄이 되어 민다나오섬에서 최초의 이슬람 왕국을 코타바트에 건설했다. 후에 마긴다나오족은 마긴다나오 왕국과 브아얀 왕국등을 거쳐 민다나오섬의 거의 전역을 지배했다.

정교 일치의 이슬람 왕국에서는 술탄이 모든 것을 통솔하며, 바랑가이에서 현재에 자취를 세우는 촌락은 다투라 불리는 수장이 수습했다. 술탄의 혈통이 끊어졌을 경우에는 다투 중에서 술탄이 선택되었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지아등과 같이, 이슬람법 외에 옛부터 구술로 계승되 온 아잣트라 불리는 관습법에 따라 촌락 사회가 형성되었다.

저항의 역사
스페인인이 필리핀 제도에 도달했을 무렵에는 민다나오에서부터 비사야 지방, 루손섬의 마닐라만 주변까지 이슬람의 세력하에 있었다.

1521년에 마젤란이 세부에 왔을 때, 주변의 수장은 이에 따라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지만, 세부의 대안에 있는 막탄섬의 수장 라푸라푸는 이에 저항했다. 마젤란 부대는 막탄섬으로 쳐들어갔지만 격퇴되었으며 이 때에 마젤란은 전사했다.

마젤란 이후,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잇달아 원정대를 필리핀에 보냈다. 1565년, 레가스피 원정대는 세부를 정복한 뒤, 근처의 보홀섬에서 현지 수장 시카트나와 서로의 피를 따라 마셔 구별 맹약을 맺었다. 이 「혈맹」은, 국민적 화가 호안·루나의 대표작에도 그려지고 필리핀인들에게 폭넓게 알려진 사건이다.

1571년, 레가스피는 브루나이의 영향하에 있던 마닐라의 라쟈·솔리만을 대신하여 초대 필리핀 총독이 되어, 수도를 마닐라에 정했다. 그후 수년간, 스페인은 민다나오 지방 정복에 나서지만, 민다나오의 이슬람교도가 격렬하게 저항했을 뿐 아니라 이들이 도리어 비사야 지방을 공격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또, 후에는 반목 하는 것 외에도 스페인과 적대하는 네델란드와 동맹을 맺는 등 스페인에 대항했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은 결국 이슬람교도를 완전하게 정복 하는데 실패했다.

민다나오의 이슬람교도는 스페인에서 필리핀의 통치를 양도받은 미국에 대해서도 저항을 계속하여, 지난 1899년의 전쟁 발발과 거의 동시에 모로·미국 전쟁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도 여성이나 아이를 포함한 600명이 학살되었던 다호산의 싸움(호로섬, 1906년)은 유명해, 현재까지 타우숙 족에는 강한 반미 감정이 남아 있다. 1915년, 술루 왕국은 미국과 협정을 체결하여 마침내 그 지배권으로 넘어갔다.

일본군 점령 시대당시, 민다나오의 이슬람교도도 항일 인민군(후크바라합)과 함께 일본군에 저항, 「모로대대」를 결성해 싸웠지만, 무기 공급을 받지못해 무너졌다.

이슬람교도의 현상
1960년대의 학생 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 격화와 시기를 같이 해 민다나오에서도 이슬람교도로 분리 독립의 기운이 높아진다. 기독교도의 이주에 의한 대립이 격렬해지는 가운데 1968년에 코타바트의 마타람 지사외 이슬람교도의 정치가등이 이슬람 공화국 건설을 목표로 「민다나오 독립운동(MIM)」단체를 결성했고, 1년 후에는 많은 젊은이가 말레이지아에서 군사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의 대립이 격화하는 도중, 민다나오에의 기독교도 이주를 추천한 마르코스 대통령은 마침내 1972년, 계엄령을 발표해 독립운동을 비합법화하는 한편, 무력 진압을 시작했다.

이로인해 MNLF의 존재가 표면화되었으며, 이슬람 분리 독립 주의 세력은 지금까지의 국지적인 반란사태에서 반사모로를 창설한 MNLF에 규합, 대대적인 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계속적으로 격화되어가는 전투로 인해 이슬람 제국의 압력이 가해지며 국제화 이슈로 민다나오 지역에 대한 정부의 강한 탄압이 주목되기 시작하자 마르코스는 민다나오 지역에 자치권 부여를 결의. 1976년, 필리핀 정부와 MNLF는 정전에 합의하여 트이폴리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자치구 설치에 관한 주민 투표를 둘러싸고 다시 대립, MNLF가 투표를 중단시키는 바람에 평화정착으로의 길은 멀어졌다. 그 후 MNLF 내부에서 노선의 대립이 표면화 되어가던 중, 77년도에 사라 매트파가 MNLF에서 이탈, 1984년에 「모로·이슬람 해방 전선(MILF)」을 정식으로 결성했다.

1986년도 혁명 이후 신헌법에는 이슬람교와의 자치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아키노 정권의 분리 독립 방폐를 조건으로 한 평화교섭의 요청을 받아들여 1989년에는 자치 기본법이 성립되었다. 이 법안을 둘러싸고 잠시 혼란이 발생했으나 민다나오의 13개주 9개 시에서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자치를 받아들인 것은 이슬람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4개주(남 라나오주, 마긴다나오주, 스르주, 타위타위주)로만 국한되었고 이에 대해 MNLF는 트이폴리 협정에 의한 완전 자치가 아니라고 반발했으며, 그 이후인 1990년에 이슬람교·민다나오 자치구(ARMM)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MNLF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조건부로 평화교섭에 응할 뜻이 있다고 했지만, 정부측은 이를 거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필리핀의 발전을 위해서는 외자의 도입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한 라모스가 1992년도에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1993년부터 자카르타에서 본격 평화교섭이 시작되어, 잠정적인 휴전 협정으로 연결되었다.

1994년과 95년에 이어 96년의 제4회 평화교섭에서는 MNLF 병사의 국군 편입 문제나 자치구에 관한 주민 투표의 실시, 남부 필리핀 평화 개발 평의회(SPCPD) 설치등이 최종적으로 합의되었으며, 9월 2일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평화협정 체결 당일에는 일본 정부도 환영의 뜻과 함께 지원 검토등을 표하고 나섰다.

제4회 평화교섭을 앞에 두고 정부측은 미수아리 의장을 ARMM의 지사 선거에 여당 후보로 포함하는 것에 합의, 2001년의 주민 투표의 결과, 지금까지의 4주에 추가하여 바실란주(이사벨라시를 제외)와 말라위시가 ARMM에 편입되었다.

한편, MILF는 개발 프로젝트에의 공격 등 전투를 계속한다.아로요 정권으로 정전협정이 연결되었지만, 전투가 그치는 기색은 없다.

또, 90년대 초두로부터 MNLF에 불만을 품는 이탈조가 잘쟈라니의 이슬람 원리주의 그룹 「아브·사얍·그룹(ASG)」에 합류, 외국인을 포함한 인질 유괴 및 살해 등 이슬람교도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있어 정부는 철저한 소탕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지금까지의 분쟁으로 인해 민다나오의 개발은 뒤떨어지게 되고 이슬람교도의 거주지역은 국내에서 가장 궁핍한 지역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세계 은행이나 아시아 개발은행등의 국제금융기관, 일본이나 미국등의 외국 정부도 민다나오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는 있으나, 무엇보다도 분쟁해결이 개발 촉진의 중요 조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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