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경쟁의 그늘
작성일 14-12-0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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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간다통신 조회 1,925회 댓글 1건본문
경쟁은 이 시대의 신(神)이다. 우리 모두가 그 앞에서 좌절하고 회개한다는 점에서, 그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경쟁은 정녕 살아있는 신이다. 경쟁은 신이므로 이성과 도덕에 기초한 물음들을 허용하지 않는다. 왜 경쟁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 것인지. 우리는 이런 의문들을 삼켜야 한다.
경쟁심이란 시기하고 적대하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데, 경쟁력이란 끝없이 욕망하고 파괴하는 능력이며 마침내 우리 모두를 파멸시키는 힘일 뿐인데, 선의(善意)의 경쟁이란 ‘비 오는 달 밤’보다 불가능하며, 경쟁의 좁은 문은 결코 천국으로 가는 문이 아닌데, 그런데도 이 시대는 경쟁을 경배하고 우리는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경쟁이 처음부터 신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담 스미드가 인간의 본성을 이기심이라고 했을 때 그 이기심은 내 손에 작은 가시가 박히는 아픔보다는 타인의 이마에 피가 흐르는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아는 이기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개인이 이기심에 충실하면 조화와 번영이 절로 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적자생존의 법칙을 제시하여 경쟁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한 인물로 알려진 찰스 다윈도 인류는 경쟁을 통해 보다 도덕적인 존재로 진화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덕(有德)한 관습들은 유전에 의해 강화되고 고정되어 갈 것이며, 인간의 고급 충동은 반드시 저급 충동을 이겨낼 것이다.”
근면하게 일하고 세속적 욕망을 절제하는 자만이 부자가 될 수 있고, 부자들의 청교도적 윤리야말로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말할 때까지도 경쟁은 아직 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나서 돌아본 축재의 세계가 동물적 이기심의 각축장이었을 때, 경쟁의 심부(深部)에서 천민성이 창날처럼 번득였을 때 경쟁은 비로소 인간을 떠나 신이 되었다.
현실사회주의가 덧없이 몰락하고, 협동과 평등과 공존의 세상이 한 걸음 물러서자 경쟁은 마침내 거칠 것 없는 유일신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망토를 걸친 경쟁의 사제(司祭)들은 날랜 붓과 날카로운 혀로 천박하고 비정한 강론(講論)을 토해내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지구는 시장이 되어야 하고, 인류의 8할은 시장 밖으로 내몰려야 한다.
경쟁은 제한이 없고, 이긴 자들의 탐욕은 멈추지 않는다. 부와 권력에 더하여 진리와 정의마저 독점한다. 세상은 이긴 자들을 위하여만 나팔을 분다. 그들의 강철 같은 의지를 찬양하고, 그들의 고매한 인격을 칭송한다. 뼈 빠지게 일하는 착한 인생들, 언제 퇴출당할지 모르는 무고한 백성들의 등짝을 밟고 승자들의 바벨탑이 솟아오르고 있다.
세월이 세월인 만큼 경쟁의 신성을 모독하지는 않겠다. 그것이 21세기 인류의 생존 조건이며 나라의 명운(命運)이 경쟁력에 달려 있다고 하니까, 아니 우리의 일터와 내 자신의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에 분노와 비애를 삼키며 이른 새벽 힘차게 운동화 끈을 맬 수도 있다. 육신의 고단함은 감내할 수 있다. 피와 땀과 눈물은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적막강산이다. 인간적 품위가 무너진 세상, 따뜻한 시선(視線)들이 사라진 세상, 우리의 어린아이들, 저 푸르고 연약한 새싹들을 경쟁의 칼날로 단련시켜야 하는 세상, 우리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편집위원 장익진 [email protected]
경쟁심이란 시기하고 적대하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데, 경쟁력이란 끝없이 욕망하고 파괴하는 능력이며 마침내 우리 모두를 파멸시키는 힘일 뿐인데, 선의(善意)의 경쟁이란 ‘비 오는 달 밤’보다 불가능하며, 경쟁의 좁은 문은 결코 천국으로 가는 문이 아닌데, 그런데도 이 시대는 경쟁을 경배하고 우리는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경쟁이 처음부터 신이었던 것은 아니다. 아담 스미드가 인간의 본성을 이기심이라고 했을 때 그 이기심은 내 손에 작은 가시가 박히는 아픔보다는 타인의 이마에 피가 흐르는 아픔이 더 크다는 것을 아는 이기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개인이 이기심에 충실하면 조화와 번영이 절로 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적자생존의 법칙을 제시하여 경쟁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한 인물로 알려진 찰스 다윈도 인류는 경쟁을 통해 보다 도덕적인 존재로 진화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덕(有德)한 관습들은 유전에 의해 강화되고 고정되어 갈 것이며, 인간의 고급 충동은 반드시 저급 충동을 이겨낼 것이다.”
근면하게 일하고 세속적 욕망을 절제하는 자만이 부자가 될 수 있고, 부자들의 청교도적 윤리야말로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말할 때까지도 경쟁은 아직 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나서 돌아본 축재의 세계가 동물적 이기심의 각축장이었을 때, 경쟁의 심부(深部)에서 천민성이 창날처럼 번득였을 때 경쟁은 비로소 인간을 떠나 신이 되었다.
현실사회주의가 덧없이 몰락하고, 협동과 평등과 공존의 세상이 한 걸음 물러서자 경쟁은 마침내 거칠 것 없는 유일신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망토를 걸친 경쟁의 사제(司祭)들은 날랜 붓과 날카로운 혀로 천박하고 비정한 강론(講論)을 토해내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지구는 시장이 되어야 하고, 인류의 8할은 시장 밖으로 내몰려야 한다.
경쟁은 제한이 없고, 이긴 자들의 탐욕은 멈추지 않는다. 부와 권력에 더하여 진리와 정의마저 독점한다. 세상은 이긴 자들을 위하여만 나팔을 분다. 그들의 강철 같은 의지를 찬양하고, 그들의 고매한 인격을 칭송한다. 뼈 빠지게 일하는 착한 인생들, 언제 퇴출당할지 모르는 무고한 백성들의 등짝을 밟고 승자들의 바벨탑이 솟아오르고 있다.
세월이 세월인 만큼 경쟁의 신성을 모독하지는 않겠다. 그것이 21세기 인류의 생존 조건이며 나라의 명운(命運)이 경쟁력에 달려 있다고 하니까, 아니 우리의 일터와 내 자신의 생존이 걸려 있기 때문에 분노와 비애를 삼키며 이른 새벽 힘차게 운동화 끈을 맬 수도 있다. 육신의 고단함은 감내할 수 있다. 피와 땀과 눈물은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적막강산이다. 인간적 품위가 무너진 세상, 따뜻한 시선(視線)들이 사라진 세상, 우리의 어린아이들, 저 푸르고 연약한 새싹들을 경쟁의 칼날로 단련시켜야 하는 세상, 우리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편집위원 장익진 [email protected]